느끼다

울 엄마의 행복론

지금저금 2022. 5. 23. 01:46

오랜만에 제주에 사는 K로부터 카카오톡이 왔다. 그녀는 내가 제주에서 일할 때 직장 동료로 만나 친해진 동생이었다. 산책길이라면서 보내준 제주의 풍경은 여전히 예뻤다. 안부를 전하며 그녀는 법륜스님의 정토불교대학 강의를 권했다. K가 예전에 힘들었을 때 스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 했다. 이번엔 자신이 돕는 이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내가 들으면 좋을 것 같다고, 스님의 법문을 직접 들을 좋은 기회라고도 했다.

오래전부터 법륜스님은 나의 비밀 멘토였다. 우연히 보게 된 <스님의 주례사>(법륜, 한겨레)가 첫 만남이었다. 그 후로 마음이 답답하면 스님의 즉문즉설 영상을 찾아보곤 했다. 스님의 답은 명쾌했고 상황을 꿰뚫는 지혜와 통찰력에 자주 감탄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힘들 때 가끔 상담받듯 스님의 영상을 찾아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아무리 온라인 수업이라지만 5개월 과정의 정토불교대학은 부담스러웠다. 불교 신자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원할 때 언제든지 영상을 무료로 볼 수 있는데 굳이 돈을 내고 수업을 들어야 할까, 5개월이라는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내가 빠지지 않고 잘 들을 수 있을까, 망설여졌다.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제주에서 또 톡이 왔다. 법륜스님이 즉강을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그 말이 내 맘을 움직였다. 마지막이라니, 다음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니. 홈쇼핑 호스트의 매진 임박이란 말을 들은 것처럼 급박해진 나는 신청 버튼을 클릭하고 있었다.

3월 27일 입학식을 시작으로 일주일에 2번 생방송 강의를 듣고 있다. 온라인 입학식 날 자신이 바라는 것을 적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때 나는 ‘덜 괴롭고 더 즐거운 삶’이라 적었다. 정토불교대학의 목표가 ‘괴로움 없이 자유롭게 살기’다. 그건 바로 내가 원하는 바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고, 나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막상 행복이 무엇이냐 물으면 말문이 막힌다. 내게 행복은 막연했다.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도 유행처럼 너도나도 말하기 시작하니 상투적인 표현이 되어버렸다. 식상하고 시시했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정작 행복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서 불안할 때가 더 많았다.

법륜스님이 물었다.
“건강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프지 않으면 건강한 거 아닌가?’ 나는 혼잣말을 했다.
스님은 또 질문했다.
“건강하다는 것은 아프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럼 행복은 무엇일까요?”
‘즐거운 거?’ 나는 속으로 답했다.
“괴로움이 없는 상태, 괴롭지 않은 것이 행복입니다.
병을 앓지 않고 아프지 않으면 건강한 것처럼 괴롭지 않다면 행복한 거예요.”

불현듯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행복은 불행하지 않은 게 행복이야.”
언젠가 엄마가 그랬다. 그땐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거라니. 그게 뭔가 싶었다.
만약 행복이 그런 거라면 너무 재미없네, 속으로 그랬다.
나는 행복을 즐거움에서 찾아 헤맸다. 즐거워도 그게 행복인 줄 몰랐다. 그 순간은 너무 짧았기에, 즐거웠던 찰나가 지나가고 나면 허무가 찾아왔기에, 그러면 나는 또 더 큰 즐거움을 원했기에. 즐거운 순간은 짧았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반면 지루한 일상은 길고 길었다. 그래서 행복은 멀리 달아나 버리고 없었다.

‘즐거움은 괴로움과 다르지 않다’ 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즐거워지려는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고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면 동전의 양면처럼 괴로움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고 스님은 말했다. 나는 괴로움 없이 즐거움만 취하려고 했는데 그게 다 욕심이었다.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 어리석었음을 이제는 조금 알겠다. 이룰 수 없는 헛된 욕망과 욕심을 채우려고 애를 쓰니 괴로워진다. 입학식 날 ‘덜 괴롭고 더 즐거운 삶’이라고 적었던 나의 바람을 다시 고쳐 적는다. 그저 ‘괴로움 없이 살기’라고. 무탈한 하루를 보냈다면 행복한 하루를 보낸 거다. 별일 없이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불행하지 않은 게 행복한 거야. 행복은 별거 아니야.
울 엄마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