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다

<어록> 열한살 인생 최악의 날 5위_20220225

지금저금 2022. 2. 26. 01:30

 

코로나에 직격탄 맞은 날.
처음으로 자가진단키트 검사를 했는데 결과는 음성.
열네살 아들은 양성이 나왔다.
아들만 PCR 검사 받고 결과 기다리는 중.
내일 검사 결과가 양성이면 가족 모두 PCR 검사를 받아야 한다.
가족관계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하더라.

11살이 된 딸이 말했다.
"오늘은 최악의 날 5위 안에 들어."
그럼 최악의 날 1위는 뭐냐 물으니,
"넘어져서 이마 찢어진 날!"
2위, 3위 줄줄이 다쳤던 날들의 릴레이다.
유독 잘 넘어지고 크게 다쳤던 딸.

기분이 급우울해지려고 해서 다시 물었다.
"그럼 최고의 날 1위는 언제야?"
딸은 주저없이 답한다.
"해외 여행했던 날! 하와이, 괌, 일본 여행했을 때가 최고야."
제주 여행과 태국 여행이 공동 2위라는 것도 재빨리 덧붙인다.
왜 태국 여행만 2위냐고 물었더니 더워서란다.

딸보다 수많은 시간을 살아온 내게 인생의 최고의 날과 최악의 날을 꼽으라면?
최고의 날을 떠올려보니 많은 추억들이 생각난다.
제주에서 2년을 살았던 순간들, 가족과 함께 했던 미국 옐로우스톤 여행, 아이들과 함께 걸었던 올레길. . .
좋았던 순간들이 너무 많은데 막상 1위를 차지할 만한 최고의 순간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행복의 극치를 맛보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딱 하루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 내 인생 최악의 날은?
아들 문제로 속이 시커맣게 타들어 갔던 날들, 둘째를 낳고 출산우울증으로 매일 울었던 날들, 사기를 당한 엄마에 대한 걱정과 분노로 잠 못자던 날. . .
역시 힘들고 괴롭던 순간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그런데 역시 이상하게도 최악의 날, 최악 중에 최악을 못 뽑겠다. 돌이켜보면 너무 싫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순간들인데 그렇다고 그런 순간들이 최악의 날 1위를 차지하기가 석연찮다. 이미 그런 날들은 지나갔고 그때 느꼈던 고통들도 희미해져서일까?

최고, 최악이란 것이 과연 모호하기만 우리의 삶에 있기나 한 걸까? 중년의 나이가 되고 보니 좋기만 한 일도, 나쁘기만 일도 없을 때가 많다. 힘들었던 순간들도 종국엔 지나가고 나의 경험치를 넓혀주었다. 좋았던 순간들은 이후에 더 좋은 추억들로 잊혀졌다. 내가 수많은 순간들을 다 지나왔다는 것에 오히려 더 놀라게 된다.

그 많은 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어린 시절, 청춘의 시간들. 지금은 그저 그 모든 순간이 최고의 날이었구나 싶다. 아니 모든 날들이 소중하기만 하고 귀하디 귀하다.

 

 

마스다 미리, [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 중에서